위 영상은 독립운동 정신을 담아 복원한
’회화나무 3D 미디어아트’ 입니다.
"또 하나의 독립운동가" 회화나무를 추모하며 "또 하나의 독립운동가" 회화나무를 추모하며 김마리아 열사와 함께
대한민국 독립의 희망을 지켜주었던 나무

김마리아 열사가 몸담았던
정신여학교 옆
한그루의 회화나무

학생들의 비밀문서와 태극기
교과서를 숨겨주어
독립운동 나무라 불리었던

회화나무가
지난 겨울, 갑작스런 폭설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혹독한 일제 치하에서도
굳건하던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거센 눈보라에
비록 나무는 꺾였어도
독립운동의 정신만은
결코 꺾이지 않도록
김마리아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고
떠나간 회화나무를 추모하겠습니다

위 영상은 독립운동 정신을 담아 복원한
회화나무 3D 미디어아트’ 입니다.

"또 하나의 독립운동가" 회화나무를 추모하며

"또 하나의 독립운동가" 회화나무를 추모하며

김마리아 열사와 함께 대한민국
독립의 희망을 지켜주었던 나무

김마리아 열사가 몸담았던
정신여학교 옆
한그루의 회화나무

학생들의 비밀문서와 태극기
교과서를 숨겨주어
독립운동 나무라 불리었던

회화나무가
지난 겨울, 갑작스런 폭설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혹독한 일제 치하에서도
굳건하던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거센 눈보라에
비록 나무는 꺾였어도

독립운동의 정신만은
결코 꺾이지 않도록

김마리아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고
떠나간 회화나무를 추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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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와 함께 지켜온
김마리아 열사의 독립운동 이야기

회화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독립의 꿈

김마리아 선생님은 189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김필순은 한국인 최초 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그의 집에는 안창호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생활하면서 김마리아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항일 운동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정신여학교를 1910년에 졸업한 뒤, 정신여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의식을 일깨우는데 힘쓰셨습니다.

당시 정신여학교 교정의 회화나무는 그녀가 독립에 대한 신념을 다지고 많은 고뇌와 결심을 보낸 상징적인 장소로 전해집니다. 일제 순사들이 정신여학교를 급습한 일이 있는데, 이를 눈치챈 김마리아 선생님은 태극기, 역사책, 독립운동과 관련한 비밀문서를 회화나무 줄기 구멍 안쪽에 숨겼습니다. 순사들은 결국 나무줄기의 구멍 안쪽은 들여다보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회화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독립의 꿈

이후 1914년 김마리아 선생님은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조선청년독립당’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식민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민족의 의지를 담은 2.8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게 됩니다. 1919년 2월 8일 400여명의 재일유학생들은 동경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김마리아 선생님은 이 선언문을 비밀리에 몸에 숨기고 부산항으로 귀국해, 전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녀가 전달한 2.8 독립선언에 감명을 받은 여러 사람들과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했고,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 마침내 전국적인 항일민족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모두 기모노를 입은 가운데 혼자 한복을 입고 있는 김마리아 열사(오른쪽 끝 중간)
[사진으로 보는 정절과 신앙의 貞信 120年]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제공

고통 속에서 맹세한 사랑, 조선과의 결혼

이후 김마리아 선생님은 3.1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체포됩니다. 경찰서로 끌려간 사람들과 달리 김마리아 선생님은 조선총독부 경찰 최고 지휘부인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어 20대의 여성의 몸으로 견디기 힘든 가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나는 조선의 독립과 결혼했다”고 외치며 독립운동가로서의 결의를 다시 한 번 다졌습니다.

석방 이후 김마리아 선생님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임시정부 운영자금 및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여전도회 회장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일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한 그녀는, 독립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 그 자체임을 몸소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김마리아 선생님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944년, 광복을 1년 앞두고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립기념관 제공

별이 된 그녀, 회화나무가 전하는 이야기

1946년 여성동지 회견에서 김마리아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김구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셨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 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씨가 자주 독립기금을 보내 왔습니다. 그녀는 기미년 만세때에 큰 활약을 하여 일제의 악독한 체형을 받았습니다만 끝끝내 굽히지 않고 애국운동을 하신 여성 애국자입니다. 그런데 조국해방을 못보고 1년을 못채운 채 돌아가셨다니 통분할 노릇입니다.”

별이 된 김마리아 선생님을 뒤로한 채, 홀로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던 회화나무는 약 600년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2024년 12월 폭설로 인해 쓰러졌습니다. 거센 눈보라에 또 하나의 별이 된 회화나무는 이 곳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푸른 잎새를 다시 틔우며, 지금 이 순간에도 독립운동의 정신을 우리 마음 속에 전하고 있습니다.

김마리아(왼쪽)가 안창호(가운데)를 환영하며 찍은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회화나무에 깃든 역사를 기억하며, 김마리아길 - 일제강점기 시대 최대 여성 비밀 항일 단체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와 독립운동의 거점장소를 돌아보는 코스. 1. 연동교회 2. 세브란스 관 3. 그루터기 및 흉상 4. 선교사의 집 5. 여전도회관 회화나무에 깃든 역사를 기억하며, 김마리아길 - 일제강점기 시대 최대 여성 비밀 항일 단체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와 독립운동의 거점장소를 돌아보는 코스. 1. 연동교회 2. 세브란스 관 3. 그루터기 및 흉상 4. 선교사의 집 5. 여전도회관